또 하나의 능선을 넘으며
(칠십대 할머니의 합격수기)

2008년 국어국문학과 학사학위취득 최우지(아호)

독학사 최종 합격 소식을 듣고 또 하나의 능선을 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독학사 시험은 암기보다는 교재를 이해하면서 공부해야 주관식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와이제이의 교재가 해설식으로 집필되어 있어 주관식 문제는 시험을 잘 볼수 있었습니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갑자기 굳게 잡고 있던 끈을 놓아버린듯 허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결코 평탄한 길을 걸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제 말기에 태어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해방이 되었고,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어수선함 속에서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 시절 여자는 대개 그 정도의 학벌이면 좋은 신랑감을 만날 수 있다고들 여기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유교사상이 골수에 박히셨던 아버지께서는 딸이 홀로 객지에 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차선으로 지방 국립대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녀 공학이라는 이유로 극구 말리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여자대학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가정학과만 있는 초급대학이었습니다. 더구나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학업 분위기가 엉망이었습니다. 문학 소녀였던 내게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곳이라 여기고 미련없이 휴학을 하고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그 일이 못내 후회가 되었고 언젠가는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대가족의 장손 며느리인 내게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열심히 글을 썼고, 그 방면에서는 제법 인정을 받으며 차츰 학위증에 대한 미련은 사라져갔습니다. 그러기를 수 십년, 이제는 가족들이 뿔뿔이 자기 길 찾아 떠났고, 부부만 달랑 남게 되었습니다.

슬그머니 완전히 사라진줄 알았던 미련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육십대 후반인 나로서는 학교를 정식으로 입학하여 다닐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던 즈음에 신문광고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 독학사의 길이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바로 인터넷으로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내 전화가 걸려 왔고, 혼자서 공부하여 짧은 시일에 학위를 딸 수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등록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며칠 수 책이 왔는데 분량이 엄청났습니다. 17과목의 책과 녹음 테이프였으니까요.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날로 책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독학사. 학교 출석을 안 해도 되니 우선 좋았습니다. 매학기 등록금 걱정을 안하는 것도 독학사의 큰 장점이었습니다.
YJ에 한 번 등록을 하면 2년이 걸리든 책임지고 돌봐주겠다는 약속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녹음테이프로 강의를 들으며 책을 읽어갔습니다.
머리속에 무엇인가가 채워져가는것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사이에 나는 세번의 크고 작은 수술과 이사, 또 집안 형편 상 두 도시를 오가며 삼년을 지냈습니다. 학위 취득이 늦어진 이유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중단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얼마가 걸리든, 언제 끝을 맺던 나는 끝까지 가볼 참 이었습니다.
그렇게 거북이 걸음으로 드디어 또 하나의 능선에 올랐습니다.
시험 전에 수차 전화로 용기를 주시고 참고 자료를 보내주신 YJ학사고시 직원여러분에게 이자리를 빌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내일 모래면 다시 수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외과 수술로는 가장 큰 수술이랍니다. 그러나 합격소식을 듣고 가게되어 마음이 가볍습니다.

수술을 잘 받고 나와서 나는 다시 또 하나의 능선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디딜 참입니다.
나이란 자만 숫자에 불과할 뿐이고 삶은 보다 놓은 곳을 향해 쉼 없이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