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간호학과 238841] 꿈은 이루어진다.

내 나이 55세..학사의 꿈은 이루어 졌다.

2010년 12월 7일, 시험 결과를 보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 지 32년 만에 학사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YJ 학사고시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기 어려웠을 지 모를 나의 꿈.

고교 시절 사학과를 지망하고 공부 하던 중, 고3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어머니 혼자 가정을 꾸려가시게 되었다. 대입 예비고사를 본 후였지만 언감생심 대학 진학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담임 선생님께서 공부도 계속할 수 있고 미국으로 취업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있는 간호전문학교로 진학을 권유해 주셨다.

그 당시 인천에는 공립 경기간호전문학교가 있었는데, 공납금도 싸고 도보 통학으로 교통비도 안 들어서 한 번 지원을 해보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로 인해 경쟁률이 높았지만 합격을 했고, 학과 공부를 하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해서 학비도 벌고 어머니께 생활비도 드렸다.

그런데 내가 졸업하던 78년도에 미국 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국내로 취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간호사들이 전문 학교 출신들이었고 경쟁률도 높아서 아주 당당히 지낼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나의 학구열은 그칠 줄 몰랐고 간호사 컨퍼런스에도 열심히 참여하며 지식을 축적해 갔다.

그러던 중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병원을 그만두고 시부모님 봉양과 자녀를 키우는 데 전념해 달라는 남편의 부탁에 전업 주부의 길을 택했다. 전문학교를 졸업한 다른 친구들은 계속해서 방송통신으로 학사학위를 따고 대학원을 진학하고 발전해 나갔다. 내 마음은 친구들의 발전을 축하하면서도, 한 편으로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미련이 생겼다.

아이들을 키우며 바쁘게 지내던 중, 늦둥이 막내 젖먹이 때 남편이 잠시 아파 쉴 때 내가 병원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때다 싶어 방송통신대에 3학년으로 편입학을 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 해놓고 직장에 다녀오면 가사일을 하느라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출, 퇴근 시간뿐 이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를 하는데 시어머님도 안 좋아하시고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다 보니 결국 탈락하고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이 복직을 하고 나니 가늘게 먹고 가늘게 쓰라며 병원도 그만두라는 시어머님 말씀에 다시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집에서는 아이들과 같이 공부도 봐주고 그럭저럭 평온한 나날이 있을 즈음에 보건교사임용고시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또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들을 돌보며 틈틈이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다시 시어머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내가 임용 고시 붙으면 보건교사를 나가게 되니까 안 된다며 시험 떨어지라고 고사를 지낸다고 하시고, 아직 어린 막내는 자기랑 놀아 달라고 내가 공부하는 책상에 올라가서 내려 오질 않았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몰래 몰래 공부를 하고,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악 조건 속에 치른 시험은 낙방을 하고 아무래도 난 안되겠기에 교재는 아는 후배에게 주었다.

뒤돌아보면 초등시절부터 누구에게도 열심히 공부하란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자꾸 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크게 망하고 난 뒤 태어난 막내딸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책상 하나 없이 그저 밥상 놓고 아니면 방바닥에 엎드려 몽당연필 침에 바르며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새로운 지식에의 갈망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책을 들게 하고 시험에 떨어져도 낙심 하지 않고 언젠가는 꼭 성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공개적으로 내가 즐길 것은 신문보기였다. 신문을 보면 아무도 못 보게는 안 하니까..공부하면 주위에서 모두 싫어하지만 신문은 아무 방해 안받고 할 수 있는 나의 공부방식이었다. 그래서 신문을 즐겨 봤는데, 이번 고시 때에도 조금 도움은 되었다.

2004년, 시어머니도 고인이 되시고 6개월이 채 안되어 폐암 판정을 받고 열심히 투병하던 남편도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비록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고되고 하고 싶은 공부도 못했지만 처해진 상황은 어쩔 수 없었고 남편은 나를 아끼고 너무나 사랑해주었기에 남편의 사망은 하늘이 내려 앉은 것 이나 다름없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119를 수시로 타며 남은 4남매의 애를 태웠다. 지금 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의 인생의 암흑과 같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맙게도 잘 자란 4남매가 서로 도우며 장하게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씩씩 하게 똘똘 뭉쳐서 가정을 이끌어가고 나를 간호 했다.

대학교수로 있던 친구가 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내 모습을 보고 이대로 두면 죽겠다며 병원 경력을 살려 강사로 활동하면서 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에 있는 간호학과 학점인정제를 이수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런데 학점인정제도는 과목당 만만찮은 비용이 들고 80% 출석을 해야 되는 게 나로서는 부담이 되었다. 급한 대로 성인 간호학과 지역사회 정신간호학 2과목은 수강했지만 결국 또 학사 따는 것이 중지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강의를 하면 할수록 내가 4년제 학사가 아니라는 중압감은 스트레스로 작용해서 급기야, 2009년 10월 또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 아이들이 제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살아만 있어 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지친 나는 모든걸 접고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2010년 내가 두 달쯤 쉬고 정신을 차릴 즈음에 학원을 하는 친구가 자기학원에서 하루 2시간 정도만 강의를 하라고 하길래 아이들 허락 받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실은 아이들이 그 친구를 좋아해서 허락을 해 준 것이다.

하지만 강의를 하면 또 가슴 깊이 잠재워둔 학사는 해야 한다는 갈증이 나를 불태웠다. 친구는 유명대학 석사이고, 나는 병원경력과 그 동안 많은 교육이력에도 불구하고 딱 한가지 전문 학사 라는 게 늘 가슴에 응어리져서 가슴이 답답했다.

그 때, 우연히 전에 가입했던 YJ학사고시에서 전화가 왔다. 상담을 받아보니 그 당시 내 마음에 딱 맞아떨어져서 아이들에게 의논해서 바로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노현정 교무처장님 말씀대로 승승장구하며 지도해 주는 대로 교재도 읽고 강의도 듣고, 스스로 계획과 알려주신 계획에 맞추어 재미있게 공부했다.

그런데 직장에서 점점 강의가 많아지고 시험 대비 반 강의도 하게 되니 내 공부할 시간도 점점 없어졌다. 직장은 급여를 받고 하는 일이라 소홀히 할 수가 없어서 강의 준비를 철저히 하다 보니 내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 아닌가. 언제나 내 책을 쳐다보며 공부해야 하는데 하면서 도 학생들 교안준비에 바쁘고 점점 지쳐갔다. 몸도 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도 나를 걱정하며 말리기 시작했고, 내 생각에도 그러면 그렇지 내가 뭘 학사고시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자신감도 없어졌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출근 하기 전 짬짬이 공부하고, 아들이 복무하는 군대에 면회를 가면서mp3에 강의를 넣어서 왕복 6시간 동안 들으며 다녔다. 공부하면 좋은 점은 그 때만은 다른 생각이 안 나고 그렇게 행복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편 잃은 슬픔도 그때만큼은 견딜 수 있었다.

10월에 접어 드니 마음도 바쁘고 모의고사도 풀어야 하고 할거는 많은데 점점 자신이 없어져서 YJ에 연락하니 선생님들이 시험자료도 보내주시고 했지만 영 정리가 자신이 없어져서 각종자료와 모의고사를 쳐다만 보게 되었다. 그리곤 아예 시험을 보지 말아야지…이제부터 다시 열심히 해서 내년에 다시 도전하면 아마 1등 할거야 라며 공부를 놓았다.

그렇게 하고 싶던 공부를 시험 앞두고 내년에 볼 생각을 하니 아쉬우면서도 그렇게 편하고 널널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너무 많아서 이제부터는 놀아가면서 해도 내년에는 꼭 붙을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에 푹 쉬었다.

그런데, 이제는 큰 아들과 큰 딸이 아니 그냥 떨어져도 좋으니 그냥 가서 시험만 봐라 출제경향을 알아야 내년에도 잘 볼 것 아니냐며 올해 꼬옥 시험을 보라며 시험에 접수를 해버린 것이다.

큰 일이 난 것이다. 그래서 시험 2주를 앞두고 그 때부터 그 동안 공부한 것을 총정리 하기 시작 했다. 그래도 그 동안 틈틈이 해 놓았던 것들이 생각이 하나 둘 떠 오르고, 노현정 교무처장님 지도대로 좀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어쩌나 그래도 해보자며, 시험 보기 마지막 날까지 거실은 교재와 문제집으로 도배를 해놓고…그래 해보자 이번에 학사가 안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자 하는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공부를 했다.

시험보기 전 날까지 낮에는 출근을 하니 밤늦게 3시까지 문제를 풀어보곤 잠시 눈을 붙이고 고사장으로 갔다. 날씨는 쌀쌀한데 수능 보는 것 보다 더 떨리는 마음으로 고사장 입실을 했다. 정말 생각 과는 다른 유형의 시험 문제였지만 그 동안 들은 강의와 교재를 떠올리며 하나씩 정성을 다해 풀었다. 간호연구는 어려웠지만 국어, 국사에서 점수를 더하려고 총점합계제로 신청했고, 그래 점심도 커피한잔으로 때우고 시험을 마치던 나는 마치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붙고 떨어짐을 떠나서 최선을 다한 나를 장하다고 스스로 격려하며 집으로 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떨어질 거라며 기대 말라고 했지만 내심 정말 붙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시험 발표 일주일 전부터 조마조마해서 매일 새벽 3-4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아이들과 내가 가르치는 학원생들에게도 꿈과 진정한 용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꼭 붙고 싶었다.

드디어 12월 7일 합격!!!!!!!!!!!!

학사를 꿈꾸는 학우들에게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학사가 되는 길은 많지만 열심히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YJ 학사고시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아니었으면 지금도 내 방식대로 하면서 후회와 탄식이 반복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준비한 기간 동안 집중해서 공부한 시간을 계산해 보면 3개월 정도가 된다. 전문 학사고시 YJ에서 말하는 3개월 만에 간호 학사되기!!! 맞는 것 같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 이제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할 수 있는 용기가 절로 난다. 끝으로 나에게 항상 의지가 되고 힘이 되어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학사학위의 등대가 되어준 YJ학사고시의 노현정 교무처장님, 홍은선 선생님, 고은정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