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년 만에 학사의 꿈을 이루다.

저는 2살 된 예쁜 손녀를 둔 할머니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있다면 혹시라도 나이 때문에 주저하시거나 용기가 없으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과 도전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1977년도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국영기업체 의무실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늘 내 마음 한구석 에는 꼭 공부를 더해서 학사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편입도 알아보며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꼭 공부를 더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결혼과 더불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집에서 자녀를 키우고 시어머님과 시동생을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미국생활의 언어적 불편과 환경적 낯설음이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가던 중 아직은 어린 두 자녀를 기르면서도 학교를 다시 다녀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학교가 있어서 간호학과에 입학허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학기만 끝내고 비싼 학비로 인한 경제적 이유와 아이들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어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로써 그리고 자녀들에겐 지극히 보수적이고 엄한 엄마의 모습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느덧 아이들은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고 나도 이제는 나의 전공을 살려서 전문 직종에서 일하며 나를 위한 새로운 삶을 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미국 간호사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 대수술 후 집에서 요양하며 혼자 책과 씨름하던 중 간호학교를 졸업한지 25년 만에 미국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자녀들보다도 어린 간호사들과 함께 병동에서 일하면서 한번도 나이에 대해서 불편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병원에서 일하면서도 늘 학사에 대한 열망은 있었지만 지금 이 나이에 일을 하면서 수업을 들어야하고 또 미국대학의 비싼 학비와 몇 년을 공부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있었지만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 독학사란 글자가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와이제이 학사고시 광고였습니다. “아, 내가 왜 여태 이걸 모르고 있었나...”
마침 한국을 갈 기회가 있어서 3월 달에 곧 바로 찾아가서 등록을 하고 책을 받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 “결코 어렵지 않으니까 열심히만 하면 합격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래 바로 이게 내가 찾던 거야 난 할 수 있어 미국 간호사 시험도 혼자서 공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전공과목의 책 들을 보는 순간 나에게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습니다.
간호과정론, 연구방법론, 지도자론 그리고 윤리와 법 어느 것 하나 내가 학교 다닐 때 들어보지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 지금부터 40년 전, 1974년 처음 간호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의 학생의 신분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 하고 열심히 하기로 마음속 깊이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비상하지도 않은 두뇌에 나이까지 먹은 탓인지 책만 덮으면 기억력이 삭 사라지고 외운 것들이 잘 박히지가 않았습니다.

병원근무가 오후반이라 아침에 일어나서 근무 나가기 전까지 공부하고 쉬는 날은 종일 집중해서 공부하며 4, 5 6월은 그렇게 보냈는데 7, 8 월은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셔서 거의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했고 9월이 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고 슬슬 불안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괜히 시작해서 사서 고생한다고 후회도 해 보았습니다 내 자신과의 싸움이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 칼을 뽑았는데 다시 꼽을 순 없어,“

일단 강사님들의 강의를 한 번씩 책을 보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선 문제집에 있는 문제들을 풀은 후 하나하나 책에다가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의고사와 기출문제를 한 번씩 풀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 번씩 밖에